
3년 만에 주가 10배. 한미 반도체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랠리를 절반쯤 놓쳤습니다. HBM이라는 단어가 뉴스에 오르내리기 시작할 때 그제야 뒤늦게 회사를 찾아봤죠. 지금 유리기판 흐름을 보면서 그때 감각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입니다. 이번엔 좀 더 일찍 들여다보고 싶어서 정리해 봤습니다.
ABF기판의 한계
솔직히 처음 유리기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도 반응이 시큰둥했습니다. 기판 소재가 플라스틱이든 유리든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수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공정 원리를 들여다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반도체 패키징에 쓰이던 기판은 ABF 기판입니다. 여기서 ABF 기판이란 에폭시 수지 계열의 유기 소재로 만든 플라스틱 기반 기판으로, 지금까지 반도체 패키지의 표준 소재로 쓰여온 물질입니다. 문제는 AI 반도체가 커지고 뜨거워질수록 이 소재가 열에 의해 미세하게 휘어진다는 겁니다. 업계에서는 이걸 워피지(Warpage)라고 부릅니다. 워피지란 기판이 고온에서 비틀리거나 굽어지는 현상으로, 칩과 기판 사이의 미세 연결부가 끊어지는 불량을 일으키는 직접 원인입니다.
엔비디아 GPU 하나가 내뿜는 열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면 이게 왜 심각한지 감이 옵니다. 칩 자체 성능은 매년 두 배 세 배씩 뛰는데, 그 칩을 받쳐주는 그릇이 열을 못 버티면 결국 성능을 다 쓰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직접 반도체 공정 전문가를 인터뷰한 건 아니지만, 이 소재 한계 문제는 업계에서 이미 2020년대 초반부터 공공연하게 언급되던 이야기였습니다.
유리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열팽창계수가 플라스틱보다 훨씬 낮아서 고온 환경에서도 형태가 거의 유지됩니다. 거기에 더해 TGV(Through Glass Via) 기술, 즉 유리에 수직으로 미세한 구멍을 뚫어 전기 신호를 위아래로 연결하는 기술을 적용하면 기존 ABF 기판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배선 밀도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AI 서버 운영사들이 전력 요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지금, 같은 성능을 더 적은 전력으로 낼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하기 어려운 강점입니다.
유리기판 선두 앱솔릭스
유리기판 시장은 지금 사실상 3파전입니다. SKC 자회사인 앱솔릭스, 삼성전기, LG이노텍이 각각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신기술 초기 시장에서는 먼저 양산 라인을 세우는 회사가 고객사 인증을 선점하고, 그 이후 반복 수주를 사실상 독점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한미 반도체가 TC본더 납품 인증을 SK하이닉스에서 따낸 뒤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TC본더란 HBM 제조 공정에서 여러 겹의 메모리 칩을 열과 압력으로 접합하는 장비로, 이 장비 없이는 HBM 자체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공급할 수 있는 회사가 한 곳뿐인 구조가 만들어지자 주가는 수직으로 올라갔습니다.
앱솔릭스는 미국 조지아주 코빙턴에 세계 최초의 고성능 컴퓨팅용 유리기판 양산 공장을 완공했습니다. 현재 인텔, AMD를 대상으로 고객 인증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고객 인증이 완료된다는 건 단순 계약이 아니라, 해당 고객사 공급망에 공식으로 등록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도체 공급망은 한번 검증된 납품처를 잘 바꾸지 않기 때문에, 이 인증이 수년치 수주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경쟁사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앱솔릭스(SKC): 미국 조지아 공장 완공, 2026년 3분기 양산 목표, 고객 인증 진행 중
◇ 삼성전기: 세종 사업장 파일럿 라인 구축, 2026년 하반기~2027년 양산 목표
◇ LG이노텍: 구미 공장 시생산 라인 구축, 2027~2028년 양산 목표
선두와 후발 사이에 최소 1년에서 2년 차이가 납니다. 2026년 세계 유리기판 시장은 약 23억 달러 규모이며, 2034년에는 42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됩니다(출처: 조선비즈). 이 성장이 선형적으로 분산되는 게 아니라 양산이 본격화되는 2026년에서 2028년 사이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지금 시점이 그 직전 구간에 해당합니다.
투자 리스크를 알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유리기판이 완벽한 소재처럼 들리지만, 제가 이 주제를 파면 팔수록 불편하게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취성(脆性) 문제입니다. 취성이란 소재가 일정 이상의 충격이나 압력을 받으면 휘지 않고 바로 깨지는 성질을 말합니다. 플라스틱 기판은 공정 중 외부 충격이 와도 어느 정도 유연하게 버티지만, 유리는 한계 이상이 오면 그냥 부서집니다.
반도체 양산 라인에서 기판 하나가 깨지면 공정 전체가 멈추고 라인 오염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계에서 양산 가능 기준으로 보는 수율은 90% 이상입니다. 수율이란 전체 생산량 대비 불량 없이 출하 가능한 제품의 비율로, 이 수치가 90%를 넘지 못하면 원가를 맞출 수 없어 사업성 자체가 흔들립니다.
인텔이 2023년 유리기판 상용화를 먼저 선언하고도 최근 직접 개발 대신 외부 조달로 방향을 바꾸는 걸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에도 이 수율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기술 선언에서 실제 양산까지의 간극이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거죠.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차세대 패키징 기술의 초기 양산 수율 확보에는 통상 2~4년의 공정 안정화 기간이 소요됩니다(출처: SEMI).
SKC가 2026년 5월에 발표한 1조 271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중 5,896억 원이 앱솔릭스 유리기판 사업에 투입됩니다. 처음엔 저도 주식 희석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숫자를 뜯어보니 이건 단순 자금 조달이 아니라 앱솔릭스의 수율 안정화와 양산 체제 완성에 대한 경영진의 베팅에 가깝습니다. 이 자금으로 부채비율이 232.75%에서 129.58%까지 내려올 것으로 추산되는데, 재무 구조가 안정되어야 양산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시행착오를 버틸 수 있거든요.
방향성이 맞다고 해서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닙니다. 고객 인증 완료 소식과 수율 확보 뉴스를 확인하면서 판단하는 게 기대감만 보고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그 두 개의 소식이 나오는 순간이 유리기판 시장이 이론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될 겁니다.
유리기판 투자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지금 당장 SKC 앱솔릭스의 고객 인증 진행 상황과 삼성전기의 양산 수율 관련 공시를 꾸준히 모니터링해 보십시오. 기술의 방향은 맞지만, 그 방향이 현실이 되는 시점을 확인하고 움직이는 것과 기대감만으로 앞서 나가는 것 사이의 차이가 결국 수익을 가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반드시 본인의 책임하에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