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ETF가 상장 후 두 배 가까이 오르고, D램 관련 ETF는 반년도 안 돼 160%를 넘겼습니다. 숫자만 보면 거품 논란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엔 "이게 진짜 펀더멘탈이냐, 아니면 레버리지가 만든 착시냐"를 두고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팍스 실리카(Pax Silica)라는 개념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나서, 제 판단이 꽤 바뀌었습니다. 단순한 업황 사이클이 아니라 국제 안보 질서가 반도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며 그 와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팍스 실리카 출범 배경
팍스 실리카(Pax Silica)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좀 낯설었습니다. 'Pax'는 라틴어로 평화, 'Silica'는 반도체의 원료인 실리콘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반도체와 AI 공급망을 기반으로 미국이 주도해서 만드는 새로운 경제안보 질서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군사력과 달러를 축으로 설계된 20세기 세계 질서였다면, 팍스 실리카는 그 자리를 반도체 공급망이 대신하는 21세기 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이것을 꽤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20세기가 석유와 철강으로 돌아갔다면, 21세기는 컴퓨트(Compute)와 핵심광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여기서 컴퓨트란 AI 연산에 필요한 GPU·메모리·데이터센터 전체 인프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단순히 칩 하나가 아니라 AI를 가동하는 모든 물리적 자원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미국이 이 공급망의 상당 부분을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희토류는 중국,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ASML, 첨단 패키징은 대만 TSMC, 그리고 AI에 필수적인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크게 기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HBM이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한 고성능 메모리로, AI 가속기 서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품 중 하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끼리 공급망을 묶자"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그것이 2025년 말 출범한 팍스 실리카입니다. 출범 당시 한국과 일본이 첫 서명국으로 참여했고, 이후 네덜란드·독일·그리스 등이 추가로 합류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의 합류는 상징성이 큽니다. ASML의 EUV 장비 없이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줄곧 중국 수출 통제를 요청해 왔던 네덜란드가 결국 이 틀 안으로 들어온 것은, 팍스 실리카가 단순한 협의체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안보 동맹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출처: 다음 신경제용어).
※ 요약 : 팍스 실리카는 반도체·AI 공급망을 중심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신경제안보 동맹으로,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한국·일본·네덜란드 등 핵심 공급국을 묶는 구조다.
메모리가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됐다
제가 이 흐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AI 경쟁의 핵심 병목이 GPU가 아니라 메모리라는 분석입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데이터를 보고 나서 납득이 됐습니다.
JP모건에 따르면 AI 설비투자(CapEx)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에는 20% 미만이었지만, 올해는 52%로 올라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내년에는 70%를 넘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전체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 기준으로도 메모리 비중이 2021년 2%에서 올해 18%로 아홉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숫자가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메모리가 AI 산업 안에서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핵심 전략 자원으로 격상됐다는 의미입니다(출처: 머니투데이).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 실제로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아마존은 7월부터 AWS의 GPU 인스턴스 임대 가격을 20% 인상하기로 했습니다. GPU 인스턴스란 AI 연산에 특화된 클라우드 서버 자원을 시간 단위로 빌려 쓰는 서비스인데, 수요가 공급을 훨씬 초과하다 보니 가격이 오히려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구글도 메타에 자사 AI 인프라 사용량을 제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컴퓨팅이 진짜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이 단기간에 해소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반도체 증설에는 통상 2년에서 2년 반이 걸립니다. 특히 AI용 고성능 메모리는 공정이 훨씬 복잡해서 생산량을 빠르게 늘리는 데 구조적 한계가 있습니다. JP모건, 제프리스, 모건스탠리 모두 2028년까지는 공급 부족이 해소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중국의 창신메모리, 양지메모리가 공격적으로 증설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한국·마이크론과의 기술 격차가 최소 1년 이상 남아 있고, 중국 내수 수요 자체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수출 여력이 제한적입니다.
시티그룹은 앞으로 AI 반도체 기업의 승패가 칩 성능만으로 갈리지 않고, 메모리 공급망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분석합니다. 실제로 기업별로 평가해보면 엔비디아가 가장 앞서 있고, 브로드컴이 그다음, AMD는 삼성전자와 마이크론 양쪽에서 조달하는 이중 구조를 갖췄습니다. 반면 퀄컴은 야심 찬 데이터센터 로드맵을 발표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메모리 물량 확보가 아직 불확실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 AI CapEx 내 메모리 비중: 2022년 20% → 2025년 52% → 2026년 70% 이상 전망 (JP모건)
-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 내 메모리 비중: 2021년 2% → 2025년 18% (9배 증가)
- AWS GPU 인스턴스 가격 7월부터 20% 인상 예정
- 메모리 공급 부족, 2028년까지 해소 어렵다는 게 월가 다수 의견
단기 변동성과 중장기 투자 전망
저는 이 구조를 공부하면서, 펀더멘탈이 좋다는 것과 주가가 당장 오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무리 공급이 부족하고 수요가 폭발해도, 시장은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미래를 가격에 반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모건스탠리 CIO 마이크 윌슨은 현재 반도체가 단순한 펀더멘탈 자산이 아니라 모멘텀 자산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모멘텀 자산이란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이 몰리고, 그 돈이 다시 가격을 끌어올리는 자기 강화 구조를 가진 자산을 말합니다. 은(Silver) ETF가 작년 원자재 테마를 타고 급등했다가 고점에서 크게 꺾인 흐름과 반도체 ETF의 패턴이 4개월 시차를 두고 상당히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특히 시티그룹은 한국 개인 투자자의 레버리지 ETF 자금이 이 구조에서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비트코인, 금과 은이 급등할 때마다 한국의 레버리지 자금이 상승을 확대시켰고, 규제나 수급 변화로 그 자금이 빠질 때 하락도 증폭됐다는 분석입니다. 실제로 2025년 중반 비트코인 레버리지 규제가 강화된 후 한 달 뒤 고점이 찍혔습니다. 금감원이 SK하이닉스·삼성전자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 승인이 너무 빨랐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만큼, 향후 규제 조치가 단기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의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디레버리징이란 빚을 내서 투자한 포지션이 일시에 청산되면서 자산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단기 조정을 구조적 붕괴로 오독하거나, 반대로 장기 성장 서사에 취해 단기 수급 리스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7월 이후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리밸런싱 재개, 한국은행의 긴축 메시지 강화 가능성, 헤지펀드의 차익 실현 시즌이 맞물릴 경우 변동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메모리·AI 하드웨어 사이클의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골드만삭스가 2025년 이후 테마별 성과를 분석한 결과, 1위는 반도체였고 2위는 미국의 재산업화 관련 인프라 투자였습니다. 팍스 실리카 체계 안에서 Friend-Shoring, 즉 믿을 수 있는 동맹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흐름이 투자 성과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셈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단기 변동성을 경계하면서도 메모리·전력·패키징·네트워크 인터커넥트 같은 AI 인프라 병목 테마를 중장기 축으로 가져가는 접근이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종합 의견
팍스 실리카가 한국 반도체 기업에 실직적으로 유리한 이유는 한국은 HBM을 포함한 AI용 메모리 반도체에서 삼성잔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생산량의 대부분을 담당합니다. 팍스 실리카는 신뢰 가능한 공급망 안에서만 첨단 부품을 조달하겠다는 구조인 만큼, 한국 기업들은 이체계 안에서 사실상 대체 불가한 공급자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중장기적으로는 수주 안정성과 가격 결정력 모두 한국 기업에 긍정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반도체 ETF 레버리지 투자 지금 들어가도 되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 상황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레버리지 포지션이 이미 상당히 누적된 상태입니다. 국민연금 리밸런싱, 금감원 규제 가능성, 헤지펀드 차익 실현 시즌이 겹치는 7월은 단기 변동성이 클 수 있는 구간입니다. 구조적 성장은 유효하지만, 레버리지는 그 변동성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는 점을 반드시 감안은 해야 합니다.
만약 중국이 희토류 공급을 끊으면 팍스 실리카 체계는 버틸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데요. 저는 단기적으로는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희토류 정제에서 세계 90% 가까운 지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팍스 실리카가 호주·캐나다 같은 자원 보유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핵심 의제로 포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공급망 다변화에 수년이 걸린다는 점에서, 이 리스크는 단기보다 중기 관점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AI 투자 수익성 문제가 계속 거론되는데, 메모리 수요에 실제로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요. 영향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토큰 단가 하락이나 스마트폰 고가 메모리 수요 둔화 같은 우려는 충분히 유효한 변수입니다. 다만 현재 AWS 가격 인상, 구글의 사용량 제한 같은 실제 시장 신호는 수요 둔화보다 공급 부족을 훨씬 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투자 수익성 우려가 수요를 꺾을 수 있는지 여부는 앞으로도 계속 확인이 필요한 포인트입니다.
팍스 실리카를 공부하면서 제가 바뀐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반도체 랠리를 단순히 "AI 테마 과열"로 보는 시각은 이 흐름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머지 절반은 국가들이 AI 공급망을 경제안보의 핵심 축으로 재편하고 있다는 구조적 변화입니다. 석유가 20세기 질서를 만들었듯, 메모리와 컴퓨트가 21세기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물론 단기 변동성은 현실입니다. 레버리지 수급, 규제 리스크, 헤지펀드 포지션 조정 같은 요소들이 언제든 주가를 흔들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럴 때일수록 "주가 조정 = 사이클 끝"이라는 오독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기 노이즈와 구조적 방향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장에서 가장 필요한 판단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1PIV_NGa3vc